Friday, November 27, 2020

사유리가 체험한 현실의 벽 그대로, “비혼 여성은 아직 안 돼” - 동아일보

대한산부인과학회 윤리지침 개정했지만 ‘비혼 출산’에는 “공청회 열어 해결하자” 제안
방송인 사유리는 방송을 통해 아들을 공개했다. [뉴시스]
일본 출신 방송인 사유리(41·후지타 사유리)의 ‘비혼 출산’ 파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11월 25일 사실혼 부부도 인공수정 등 보조생식술이 가능하도록 윤리지침을 개정했다고 밝혔다. 2017년 마지막으로 개정된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에는 ‘정자공여시술은 원칙적으로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돼 있다. 이 중 ‘법률적 혼인관계’ 문구를 ‘부부(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경우를 포함한다)’로 수정한 것.

하지만 그 이상의 시술 대상 확대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학회는 “임신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며, 이것의 확대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된 데 대해 환영한다”면서도 “보조생식술은 질환을 치료하는 의료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통해 가족의 형성 내지 확대를 도우므로 의료인의 윤리적 판단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 통념에 기반해 시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기존)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은 법률이 규정하지 못하거나 규정하기 어려운 생식의학 분야에 대한 자율적 규제로서 보건복지부와 논의해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정됐다”고 설명했다. 사유리가 한국에서 정자 기증을 받지 못한 것과 관련해 정부와 정치권, 사회 일각에서 “생명윤리법(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모자보건법은 비혼 여성이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하는 걸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데,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이 이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이에 관한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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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는 “보조생식술 시술 대상의 확대와 관련한 사회적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성을 느낀다”면서도 “다만 지침 개정에 앞서 사회적 논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판단해 공청회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또한 “난자·정자 공여에 의한 시술이나 대리출산 등과 관련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의 개선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저출산에도 비혼 출산은 제한

앞서 사유리는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11월 초 아들을 출산한 것과 관련해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결혼한 사람만 시험관 시술이 가능하고 모든 게 불법이었다”고 말했다. 비혼인 사유리는 지난해 10월 한국의 한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난소 나이가 48세로 자연임신이 어렵고 시험관 시술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급하게 결혼하는 걸 원치 않았던 그는 ‘자발적 비혼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비혼 여성에게 정자 기증을 해주는 병원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했다.

그렇다면 사유리에 앞서 2007년 공개적으로 정자를 기증받아 딸을 출산한 방송인 허수경 씨의 사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만 해도 생명윤리법에 난자와 정자 채취 등에 관한 규정이 아예 없었다. 이후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난임 치료 등이 등장하면서 생명윤리법과 모자보건법이 강화됐다. 하지만 정자 기증과 관련한 명확한 법 규정은 없었다. 생명윤리법에 ‘난자·정자를 기증받아 시술하려는 사람은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 뿐, 비혼 여성이 정자를 기증받아 시술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다.

법률에 명시된 규정이 없다 보니 2017년 대한산부인과학회에서 정한 ‘정자공여시술은 원칙적으로 법률적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는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이 일선 병원의 기준이 됐다. 이에 따라 현실적으로 비혼 여성은 정자 기증을 받을 수 없었다.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이번 개정으로 사실혼 부부에게도 부모가 될 길이 열렸다. 그러나 비혼 여성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여전히 꿈으로 남게 됐다.

지난여름 ‘비혼 1세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펴낸 홍재희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결혼 아니면 비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여성이 한 개인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그는 “아이를 키울 만한 경제력과 책임감이 전제된다면 (사유리의 출산을) 환영하고 축하할 일”이라며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왜 결혼한 사람만 누려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지금처럼 결혼만이 엄마가 될 유일한 방법이고 비혼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출산 권리를 제한한다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여성이 있다면 응원해주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혼으로 자녀 가질 수 있다’ 30.7% 찬성

사유리가 직접 공개한 임신 당시 모습. [사유리 인스타그램]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합계출산율(15~49세 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1.3명 이하인 초저출산 사회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92명이다. 1명 미만인 국가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지난해 30만2676명이던 출생아 수는 올해 20만 명대로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통계청이 11월 25일 발표한 인구동향에 따르면 올해 1~9월 누계 출생아 수는 21만1768명으로 전년(23만2108명)보다 8.8% 감소했다.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미국,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는 법적 부부뿐 아니라 미혼모와 동성부부도 정자를 기증받을 수 있다. 박남철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이사장은 한 방송에 출연해 “선진국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비혼 여성이 비배우자와 인공수정으로 출산이 가능하다”며 “그 이유는 임신과 출산은 개개인이 결정할 문제이지, 국가나 사회가 일방적으로 강요할 부분이 아니라는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비혼 출산의 경우 양육 조건이 좋아 아이들의 사회 적응도가 높고 잘 자란다는 보고도 최근에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도 결혼을 ‘인생의 필수 코스’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늘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만 13세 이상 가구원 3만8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2020년 사회조사 결과’)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59.5%,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0.7%로 나타났다. 2012년 각각 45.9%, 22.4%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사이 13.6%p, 8.3%p 증가한 수치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인식 변화는 임신 사진을 공개한 사유리의 인스타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만9000여 명이 ‘좋아요’를 누른 가운데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하는 일을 용감하게 선두에서 보여줘 고마워요’ ‘응원할게요, 비혼모 파이팅’ ‘멋있어요! 축하드리고 아이랑 행복하게 사세요’ 등 그녀를 응원하는 댓글 3900여 개가 달렸다.

인터넷 맘카페를 중심으로 한 여성 커뮤니티의 분위기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앞서 비혼 출산을 한 허수경 씨의 이야기가 함께 회자되면서 조심스레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키울 능력이 된다면 저출산 시대에 괜찮은 대안 같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아이 때문에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는데 멋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실천에 옮긴 게 대단하다’ 같은 댓글이 주를 이뤘다.

보건복지부는 11월 17일 임신중절 관련 내용을 담은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4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처벌하도록 한 형법상 낙태죄가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이라고 결정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보건복지부는 정부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연내에 개정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오랫동안 ‘생명윤리’를 이유로 금지돼온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여성의 선택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 선택권도 인정하는 게 어떨까. 사유리는 방송 인터뷰에서 임신, 출산, 양육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말했다.

“요즘 낙태 인정을 요구하고 있잖아요.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거꾸로 생각해 여성이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아기를 낳을 권리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이한경 기자 hklee9@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67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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